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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심판 장난…가장 불행했던 금메달리스트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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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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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은 심판이 주관적으로 채점하는 종목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심 논란에 휩싸여 왔습니다. 올림픽 복싱 역사에서 최악의 오심 중의 하나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박시헌 선수가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되돌려주는 영상이 최근 공개돼 37년 전의 사건이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오른손 다친 박시헌, 미국 선수에 일방적 열세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에서 한국의 박시헌 선수와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 선수가 만났습니다. 결승전이 벌어진 날은 1988년 10월 2일, 이날이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는 즉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전날 10월 1일까지 한국은 금메달 10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0개로 종합 7위이었는데요, 마지막 10월 2일 결승에 오른 복싱의 김광선, 박시헌 두 선수에게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김광선의 가능성은 컸습니다. 하지만 박시헌은 녹록지 않았는데요, 상대 로이 존스 주니어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 선수가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면 한국이 서독을 제치고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4위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복싱
그런데 불운하게도 박시헌은 서울올림픽 개막 2주 전에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오른손잡이인 그에게 결정적인 악재이었습니다. 그래서 8강전에서도 이탈리아 선수에게 3대 2로 겨우 이겼습니다. 이탈리아 나르디엘로 선수가 탈의실에서 1시간 동안 통곡할 만큼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박시헌은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올랐는데요, 상대의 기량이 정말 뛰어났습니다. 스피드, 펀치력, 기술에서 모두 박시헌을 처음부터 압도했습니다. 2라운드에서는 로이 존스 주니어의 강한 주먹을 맞고 스탠딩 다운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오른손을 다친 박시헌은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박시헌이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지요.

경기 후 비디오 분석에 따르면 로이 존스 주니어는 총 303회 주먹을 날려 86회의 유효 타격에 성공했습니다. 박시헌은 188회에 32회였습니다. 그러니까 공격 빈도와 유효타 모두에서 크게 뒤진 것입니다. 아마추어는 유효타를 중시하는데요, 여기서 86대 32, 로이 존스 주니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로이 존스 주니어가 이긴 경기이지요. 마지막 3라운드가 종료되자 미국 측은 승리를 확신했고 현장에 온 로이 존스 가족들도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반면 박시헌과 우리 코치진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습니다. 패배를 예감한 것입니다.


많이 맞은 선수가 금메달..경악할 만한 오심 박시헌2 박시헌
결과가 발표되자 양측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주심이 박시헌의 선수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최고 영예인 금메달이 확정되면 엄청난 환호를 해야 정상인데, 박시헌 선수는 '이게 뭐지' '뭐가 잘못됐나'는 표정을 지었고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말도 안 되는 판정이라며 극도로 실망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미국 NBC 중계진은 "박시헌이 금메달을 훔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시헌은 멋쩍어하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이긴 줄 알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로이 존스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링에서 내려갔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 반응도 갈렸는데요, 3분의 1은 박시헌의 금메달에 함성을 질렀고, 3분의 1은 어리둥절했고, 3분의 1은 거세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5명의 부심 판정 내용을 보면, 소련과 헝가리 부심이 60-56, 4점 차로 로이 존스의 우세로 판정했고요, 우루과이와 모로코 부심은 59-58, 박시헌의 1점 차 우세로 채점했습니다. 마지막 우간다 부심은 59-59, 동점으로 채점하면서도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했습니다. 이로써 박시헌은 3대 2, 아슬아슬한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판정이 나오자 박시헌은 기쁨보다는 매우 송구하다는 반응을 보였고요, 어떤 한국팀 지도자는 서로 '주고받은 셈'이라는 말로 패배를 간접적으로 시인했습니다. 주고받았다는 것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 우리 복싱 선수들이 미국의 텃세 판정으로 억울하게 탈락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년 전엔 한국이 당했는데 이번엔 미국이 당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박시헌의 금메달 덕분에 우리나라는 금메달 12개로 서독을 1개 차이로 제치고 종합 4위를 차지했는데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 순위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은메달에 그쳤다면 우리가 은메달 수에서 서독에 밀려 5위가 됐는데 박시헌의 금메달로 종합 4위에 올랐습니다. 서울올림픽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한국이 동·하계올림픽을 통틀어 종합 4위를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이례적으로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
금메달을 눈앞에서 도둑맞은 미국 선수단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거세게 항의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에 제소했습니다. 미국 복싱대표팀 코치는 NBC와 인터뷰에서 "한국 복싱 관계자가 9월 28일, 국적을 알 수 없는 심판에게 현금과 보석을 제공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겨레
국내 언론도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는데요, '한국을 먹칠한 억지 금메달', '부당한 승리'라는 비난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국내 언론사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홈 어드밴티지로 따낸 금메달을 반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습니다. 박시헌이 이겼다고 판정한 심판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3명이 모두 징계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2명은 영구 자격정지를 받아 복싱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의 행태입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미안했던지 서울올림픽 복싱 최우수복서, 즉 MVP를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수여했습니다. 그전까지 MVP는 전 체급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1명을 선정하는 게 관례였는데요, 이 관례를 깨고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은메달리스트가 MVP가 된 것은 로이 존스 주니어 딱 1명입니다.


'동독 개입' 문서 공개, IOC는 '증거 불충분'으로 결정
박시헌 논란은 1996년 구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문서가 공개되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됩니다. 동독이 종합순위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부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결승 전날 10월 1일 메달 순위를 보면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10월 2일, 미국이 복싱 3체급을 석권하고 다른 종목에서 1개를 보태 금메달 4개를 따내면 미국의 2위, 동독이 3위로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이 심판을 움직여 미국을 견제했다는 것인데요, 공교롭게도 당시 국제아마추어 복싱연맹 사무총장이자 실세였던 칼 하인츠베어 씨가 동독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독은 금메달 1개 차이로 미국을 제치고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슈피겔지는 "당시 판정에 한국 대기업 인사가 관여했다"며 한국 로비설을 주장했는데요, 1997년 IOC는 한국, 동독 모두 심판 매수에 관여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이른바 심판 매수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과도 끝내 바뀌지 않았습니다.


박시헌은 은퇴, 로이 존스 주니어는 4체급 석권 신화 박시헌 대표팀 감독 박시헌 대표팀 감독
올림픽 복싱 사상 최악의 오심은 두 선수의 인생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박시헌은 금메달을 받고도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채 결국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대인 기피증을 앓는 등 계속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모임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2020년 인터뷰에서 "당시 2등으로 끝났더라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라며 "가끔씩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은퇴 이후 체육교사 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습니다. 2013년엔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고 2016 리우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2023년 박시헌을 모티브로 한 진선규 주연의 영화 '카운트'가 개봉하기도 했는데 현재 제주는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인 로이 존스 주니어 존스는 프로로 전향한 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하며 4체급을 석권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복싱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습니다. 2020년 11월에는 전설 마이크 타이슨과 이벤트성 2분 8회전 경기를 했는데 싱겁게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시절 오직 돈 때문에 링에 올랐는데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를 찾아가 금메달 전달한 박시헌 감독 금메달 주는 박시헌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금메달 주는 박시헌 감독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35년이 지난 2023년 박시헌 감독은 로이 존스 주니어가 살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의 체육관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금메달을 전달했습니다. 로이 존스가 이 영상을 2년이 흐른 지난 9월 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로이 존스를 뜨겁게 포옹한 박시헌 감독은 "36년(실제로는 35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다"며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이어 그는 금메달을 꺼내 들었는데요, 박 감독은 통역을 맡은 아들을 통해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88년도 서울에서 홈에서 이 금메달을 가져갔습니다. 지금은 내가 잘못된 걸 알고 로이 존스 주니어의 홈에서 내가 이 메달을 (돌려줍니다)"

단순한 인터뷰 촬영으로 생각했던 존스 주니어는 "믿을 수 없다"며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SNS를 통해 "1988년 나는 복싱 역사상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에서 금메달을 빼앗겼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그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내 고향까지 찾아와 메달을 돌려줬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 스토리는 미국 방송에도 화제가 됐는데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두 명 모두 피해자이고 서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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